관료형 - 여자의 일생

관료형과 여자의 일생이라는 것이 좀 생뚱맞아 보일 지 모릅니다. 그러나 관료형을 결정짓는 것은 직책의 그릇인데, 직책의 그릇은 여성에 게 있어서는 남자나 남편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직책의 그릇은 내가 헌신하는 대상이자 내가 소속된 곳을 의미하는데, 여자가 시집을 가면 소속이 바뀌는 점에 주목하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실제로 여성은 남자와 만나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정서적으로는 물론 현실적으로 삶의 일부나 전부를 남자에게 헌신하거나 빼앗깁니다.  그래서 희생과 헌신의 의미로 여자의 기구한 인생을 관료형 인생으로 해석을 합니다. 

1974년에 나온 영화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은 한 여성의 남성 편력을 영화화하여 기록적인 수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여자의 운명은 남자에 의해 결정되고, 남자를 잘못만나면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독특한 운명 패턴이 들어 있다.


이 영화는 YouTube에도 올라가 있기 때문에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4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봐도 별로 시대차가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마 사회상을 많이 반영하지 않고 순전히 멜로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쳤기 때문인 점도 있지만,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여자 팔자를 중심 테마로 삼고 있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사실 여자팔자에 대한 통속적인 관념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바뀐 것이 없는데, 그것은 바로 남자 잘못 만나면 여자의 인생이 꼬인다는 것입니다. 

사실 영화 초반에 팔자를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아(안인숙 분)는 문호(신성일 분)를 "좋은 데"로 데리고 가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점집. 거기서 영아는 "부모 덕도 없고 젊어서 많은 남자를 갈아치웠고 결혼도 못할 팔자이고 앞날도 캄캄하다"는 소리를 듣고 나와 서럽게 웁니다. 이 장면은 영화의 방향성과 이야기의 원인을 알려 주는 장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흡사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세 마녀의 장면과 같은 것으로서, 이 영화에서의 주제는 여자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실제 이 영화는 이러한 운명의 흐름이 스토리의 중심 맥락이 됩니다. 주인공은 첫 결혼의 실패, 폭력적인 남자와의 만남 등 남성 편력을 겪으며 살아 왔고, 시작이 잘못되니 만나는 남자들마다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원인에 대해 유년시절의 트라우마나, 아니면 프로이트 식의 신경증, 어떤 무의식 같은 설명은 없습니다. 그 대신에 통속적인 운명론을 차용한 여자 팔자 이야기가 드문 드문 나타납니다.

영화의 대사들을 보면 사주풀이와 맥을 같이 하는 통속적 운명관이 그대로 반영돼 있습니다.

"난 정말 이상한 여자에요. 남자가 옆에 없으면 잠시도 살 수 없어요. 난 그래요. 난 그런 여자에요."

이 과감한 고백은 사실은 사주풀이에서  "관(官)이 많은 여자"를 통변할 때 많이 사용하는 설명과 일치합니다. 여기서 관은 직책(D)의 그릇으로서 여자에게 있어서는 남편을 의미합니다.

"참 이상해요. 남자에 의해 잘잘못이 가려져요."

이 대사 역시 "관"이 운명의 흐름을 간섭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스쳐간 사람들이 내 살 속에 박혀 있어요. 다 사랑스러워요. 다들 뭐할까?"

의심할 바 없이 도화살이나 홍염살이 있는 여성을 설명할 때 많이 쓰이는 묘사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고백들이 "참 이상해요", "이상한 여자에요" 라고 시작함으로써 모든 게 불가사의한 팔자소관임을 강조하고 있는 점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영아는 헌신적이고도 자기파괴적인 관료형 인생의 전형입니다. 이순신이 고문을 당하고도 국가를 위해 몸바치듯, 관료형 인생은 인간관계에서, 특히 남자 관계에서 헌신적입니다. 헌신에 상응하는 대가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나마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고, 남자가 없는 삶은 상상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은 주인공은 스스로 죽음을 택합니다. 상식적으로는 고통을 주는 남자들로부터 벗어나면 자유의 몸이 될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와 반대인 것입니다. 이 여자에게 있어서 남자는 삶의 이유이자 모든 것인데, 남자의 상실은 이 여자에게는 죽음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차례

20 관료형 - 여자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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